네티즌의 문제는 자존감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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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의 문제는 자존감의 문제이다.

인터넷은 도구로 시작하였지만 문화적 현상을 넘어 이제 생활공간의 하나가 되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정보 습득의 방편을 넘어 인터넷 속 가상 공간에 남아 활동하고 시간을 보낸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며 그 ‘공간’으로서의 역할은 더 광범위해졌고 필요성 또한 절실히 요구된 상황이다. 당연히 인터넷 안에도 사회생활을 하며 겪었던 많은 문제들이 존재한다. 오히려 인터넷의 동시성, 익명성 등으로 인해 그 문제의 심각성은 더 크다고 할 것이다.

인터넷은 이제 더 깊이 침투하고 있으며 아예 이제는 인터넷 공간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날지도 모르는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그동안 존재해온 인터넷 공간, 게시판과 소셜 네트워크, 화상회의, 게임, 이 모든 것들이 메타버스라는 단어로 집결하고 있다. 우리를 포함해 앞으로 더 강고해질 가상의 인터넷 공간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 다음 세대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지금은 우선,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많은 문제 중 패거리 문화에 대해 거론하려 한다. 인간의 속성으로 인해 벌어지는 많은 문제들 중 패거리 문화가 특히 심하게 나타나는 인터넷 공간에 대해 이야기 해 본다.

인터넷은 접근에 제약이 없는 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그 접근이라는 문턱이 높은 곳도 있지만 일단 그것은 논외로 한다.

인터넷의 특성 중 동시성과 익명성은 많은 자유를 주었다. 내가 누군지 밝히지 않고도 마음껏 내 목소리를 낼 수 있고, 그것은 같은 동네를 넘어 다른 나라, 지구 반대편의 사람과 같은 시간에 소통을 할 수 있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내가 누구든, 네가 누구든, 지금 이 순간 함께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척 매력적이다.

동시성은 전 국가를 하나의 라이프로 묶을 수 있고, 익명성은 특정 사람에게 주목하지 않고 누구나 동일한 무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접근의 문제를 차치하면 모두가 평등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특성으로 인해 인터넷의 이런 장점은 일부 퇴색된다. 바로 배타적인 패거리 문화가 그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나약함을 조직에 속해 보상받으려는 욕망에서 출발한다.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고 해도 여러명으로 구성된 하나의 조직을 상대로 맞서기란 쉽지 않다. 실생활에서 문제가 되는 왕따가 인터넷에서도 문제인 것이다.

거의 모든 인터넷 공간이 이 문제를 갖고 있다.

1. 게시판

온라인 게시판은 거의 모든 커뮤니티 공간을 이루는 방식 중 대표적인 방식이다. 초기 인터넷 환경에서 클라이언트가 참여할 수 있는 최초의 공간, 웹 2.0을 시작한 장본인이 게시판이다. 사용자 스스로 컨텐츠를 만들어 참여하게 된 공간.

게시판이 나타나면서 많은 스타가 출현했고, 그야말로 인터넷에 열광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아고라라는 공간의 시작이었으며 진정한 소통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많은 문제가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누구나 자신의 소리를 낼 수 있었으며 그 누구나는 정말 말 그대로 누구나였다. 민주주의가 과거 로마시대 이래로 제대로 발현된 공간이 아닐까 한다.

게시판은 댓글과 함께 발전했다. 댓글은 게시판의 민주화를 한 단계 더 높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공해의 온상이 되었다. 기술적, 제도적 대응으로 게시판과 댓글은 자정노력을 거쳤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도배를 할 수 있는 곳이 게시판과 댓글이다.

게시글이 하나의 논점을 제시한다면, 댓글은 공격하거나 동조하는 일방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 거의 모든 커뮤니티의 게시판이 흑백논리로 진행되는 모습을 보이고 다양한 의견이 오가는 환경을 유지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거의 대부분의 ‘회원’이 하나의 ‘조직’에 속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관을 말하지 못하고 주어진 방향에 동조할 뿐이다.

실제 한 사이트의 자동차 소모임 공간에서의 일이다.

어린이 보호구역의 교통법규에 관련된 일, 일명 민식이법의 시행을 놓고 논쟁이 있었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민식이법의 부당함을 성토했고 다른 법규의 처벌과 형평성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 넘쳐났다. 즉, 한 명의 운전자 입장에서 정부 정책을 비난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누군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법규다, 또는 잘 지키면 된다는 의견을 내게 되면 모두가 모여 공격했다.

이와 달리 일명 펠리세이드 사건. 이 사건에 대해서는 거의 모두가 김여사라 지칭하며 운전자의 실수로 단정했고 언론에 왜곡되어 알려진 일을 비난의 근거로 삼았다. 가끔 한 두명 제조사의 무사안일주의를 비판하면 시동이 꺼졌어도 ‘꽉’ 밟으면 브레이크가 작동한다는, 누가 봐도 무리있는 주장 등을 들고 와 공격했다. 이 경우엔 제조사의 편에서 한 운전자를 공격하는 모습이었다.

이 두 예를 보면, 그 소모임은 운전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사안에 따라 제조사를 대변하는 등, 다른 스텐스를 취했다. 단지 다수가 하나의 의견으로 통일되어 소수의 의견을 공격하는 공통점이 유지될 뿐, 그들 다수의 주장은 사안에 따라 공감하는 주체가 달랐다.

2. 트위터

트위터는 140자를 전송할 수 있는 휴대폰 문자메시지 환경에 맞게 시작한 서비스였다.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이용되는 소셜 네트워크 중 하나인데 단순한 잡담을 넘어 많은 뉴스 서비스와 유튜브 동영상 공유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게시판과 달리 한 눈에 몇 문장만 보고 넘기는 방식으로 긴 글을 보지않는 지금같은 시대에 맞는 소통방식이라 할 수 있다. 예전에는 긴 글을 트윗할 수 있는 서비스도 이용되었지만 요즘은 140글자씩 이어붙여 트윗하는 분위기 같다.

트위터는 인스타그람,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네트워크로 팔로잉, 리트윗 등의 방식으로 소통한다. 계정을 팔로잉해서 볼 수도, 리스팅해서 볼 수도 있고 뮤트, 블락 등으로 보지 않을 수도 있다. 내 계정을 팔로잉 못하게, 멘션을 달지 못하게도 할 수 있어 사용 방법에 따라 얼마든지 폐쇄적으로도 이용할 수 있다. 그야말로 패거리 소통에 최적화 된 도구라고 할 수 있겠다.

최초 서비스가 시작됐을 땐 팔로잉 허가의 방법으로 내 글의 열람에 제한을 둘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다양한 방법으로 제한의 범위를 세분화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트위터에도 온라인 게시판의 폐해는 동일하게 존재한다. 아무리 나와 잘 맞는 계정을 팔로잉 한다고 해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트윗은 계정을 잠그지 않는 한 누구나 볼 수 있고, 누구나 멘션을 할 수도 – 특별히 설정을 바꾸지 않는 한 – 있다. 

당연히 서로 멘션을 달며 공격을 반복하고 그것은 1:다, 다:다로 커지는 경우도 있다. 내 트윗이 한 번 공개된 이상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며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모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용되고 비난 받는 것을 즐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 반대로 누군가를 비웃고 비아냥 거리는 것은 매우 쉽게 한다. 바로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에 그렇다고 본다.

물론, 실제 오프라인으로도 만남을 갖으며 친분을 쌓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특별한 경우이고 대부분은 인터넷 상에서의 조우로 그친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의견에 동조하지 않거나 반대하는 경우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과 공격의 대상이 되어 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소재 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 공간에서도 예의를 잃지 않으며 서로 존중하는 마음으로 사용한다고 믿고 싶지만 실제 많은 계정들은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게 현실이다.

특히 나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으면 그것은 ‘토론’이 되지 못하고 서로의 일방적 주장만 주고 받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개중에는 근거를 갖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무조건 나와 반대되는 주장이기에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며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기도 한다.

실제 나는 내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어 입장을 바꾼 적이 있었는데, 그 과정 중 두 가지 부류를 접했다. 한 계정(답변1)은, 내가 몰랐던 사실을 자료와 함께 알려주며 내 생각을 바로잡아 주었지만(4~5번 이미지) 다른 계정(답변2)은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더 이상 이야기 할 필요 없다며 내 계정을 차단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계정은 자신이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트윗을 올리며 무용담(6번 이미지)을 지인과 공유하고 있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객관적이라고 한 적 없고 단지 가격을, 모델 변경도 아닌데 올리는 것이 부당하다고 한 것 뿐이다. 실제 다른 제조사는 인플레이션을 이유로 다음 모델 변경 때 가격을 올리겠다는 발표를 했다. 다른 분 처럼 왜 가격을 올리는게 합당한지 근거를 대지 않고 차단한 뒤, 뒤에서는 그것이 마치 자신이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는 인간이 남의 이야기를 듣지도 않아 무시했다며 험담하고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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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사실을 누군가가 모르는 상태에서 나와 다른 주장을 한다면, 어떻게 이야기를 하는게 합리적일까? 상식적으로, 나는 알지만 상대방은 모르는 그 사실을 알려주며 왜 그 주장이 틀린지 말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며 내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이와 다르게 자리를 박차고 나가며 자신이 아는 사람들과, 뭣도 모르는 인간을 만났는데 자기가 객관적이라고 해서 무시했다는 무용담을 늘어 놓는게 상식적일까? 게다가 그 사람은 자신이 객관적이라는 주장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이런 예를 우리는 실생활에서도 무수히 만날 수 있다.

3. 회사

보통 마라톤 회의라고 한다. 회의 전 관심이 많은, 책임이 많은 사람은 회의 전에 자료를 정리하고 제안을 어떻게 할지 등등 준비를 하고 참석한다. 하지만 모든 참여자가 이 사람 같지는 않다. 대부분 준비없이 회의에 참석하고 회의를 거쳐 내린 결론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회의를 마치고 회의록까지 공유했어도, 다음 회의에 다시 모여 이야기를 하면 그 전에 내린 결론도 다시 내려야 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이런 일이 정말 허다하다. 왜 회의, 토론을 거쳐도 결론은 커녕 계속 자기 주장만 하는 것일까? 아마 사회생활 이전에는 실제 나와 내 조직의 운명을 가를 중차대한 ‘토론’이란 것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토론은 민주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 해결 방법이다. 누군가의 지시로 진행하는 것이 아닌, 구성원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조율하며 하나의 결론을 만들어 내는 과정, 그것이 토론이고 민주주의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토론은 이견을 다투게 된다. 그 이견은 나름의 근거가 있어야 설득력을 갖게 되고 설득력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근거도 철학도 없는 주장이 살아남는 이유는 힘이 센 자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나라가 그랬다. 박정희가, 전두환이, 그리고 김일성이 그랬다.

회사에서 회의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건 구성원들이 설득력있는 주장을 교환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했더라도 누군가는 그 결론을 부정하고 특정인의 주장을 결론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우린 이런 모습을 작은 회사건, 큰 회사건, 그룹사건… 자주 본다. 모두 그런 상명하복에 길들여져 있고, 그것은 어릴 때 부터 그렇게 훈련받았기 때문이며, 본능적으로 인간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숨겨지기 원해서이다. 내가 너무 도드라져 보이면 책임을 져야하고 공격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공격하면 나도 동조해야 하며 동조해야 인정받고, 내가 공격받을 때 보호받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릴 때 동네 놀이터에서도, 학교 동아리에서도, 회사 팀간 조율에서도, 타사와의 회의에서도 보호받을 수 있다.


왜 그런 울타리, 조직을 필요로 할까?

나 혼자 감당하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 보호가 없으면 내 존재는 너무 보잘것 없고 내 주장은 근거를 잃으며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리와 다른 길, 생각은 너무 위험하고 두렵다고 느끼는 것은 왜일까? 그건 온전히 나라는 개인으로서 인정받으며 살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이 뭐라든 ‘나’로 인정받고 존중받는다면 내가 어떤 무리에 있든지 ‘나’는 ‘나’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믿는 것은 누구도 흔들 수 없고 무시하지 않을 것이며 가치있는 선택일 것이다.

이런 것이 자존감이다. 자존감이 있으면 자신이 어디에 있든, 설사 혼자라고 해도 거리낄 것은 없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 어떤 공격을 받든, 하물며 스스로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해도 괜찮다. 자신의 존재 가치는 한 두번 틀린다고 해도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자존감은 유아기 때 부터 만들어진다. 내가 뭔 짓을 해도 나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는 부모와 가족이 있다면 뼈속에서 부터 내 존재에 대한, 내 가치에 대한 의심은 사라진다. 내가 얼마나 존중받을 만한지, 얼마나 귀한지 어릴 때 부터 체득하고 경험한다면 자존감은 나를 지탱하는 강한 힘이 된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면 타인에 대한 존중 또한 지닐 수 있다. 내가 존중받은 만큼 타인도 존중받을 만한 존재이며 그의 주장이 허무맹랑해도 그런 주장을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 주장이 근거없고 얼토당토 없다는 비판을 받아도 난 나름의 이유로 주장했던 것이기 때문에 그건 실수, 또는 오판일 뿐이지 부끄러운 것이 아닐 것이다. 당장은 틀렸을지라도 그럴 수 있는 것이고, 지금의 판단 착오는 다음으로 연장되지 않을 것이기에 아무 문제가 없으며 그것이 내 가치와는 더더군다나 관련이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견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주장이 배척되는 것 자체가 스스로의 가치를 잃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 그렇기에 자신의 주장은 틀리면 안되고 상대의 주장이 근거가 있고 맞다 하더라도 절대 굽힐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곧 내 가치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믿음과 주장을 존재 가치의 연장선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넘볼 수 없도록, 그렇게 조롱하고 비아냥 거리며 혐오하는 것일 것이다.

결국 유아기까지 거슬러가는 문제라고 본다. 이것은 단시간에 바뀔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기가 좋지 않고 부모가 모두 일터로 나가야 하는, 아니면 내 자신이 가장 중요하고 내 시간과 돈을 나만을 위해 소비하려는 부모가 늘어난 지금 같은 시기에 피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라고 해야 한다. 문제는 점점 더 깊어질 것 같다는 것이다. 깊어질 수록 그 치료 시간은 더 길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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